미학적 변혁의 시기에 자신의 화법을 고집했던 사실주의의 거장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전기가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었다. 흔히들 에드워드 호퍼를 외로움과 소외, 공허를 표현한 화가라고 말한다. 물론 그의 도시생활을 그린 그림들이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시골의 모습을 그린 풍경화는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이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따뜻하고 밝은 느낌을 준다. 그렇다면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도시 풍경들은 어떨까? 그 그림 속에서 빛은 그림자와 대비되거나 인물의 표정과 대비되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호퍼는 빛으로 그림을 완성한 화가인 것이다.
최고의 호퍼 전문가가 쓴,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에드워드 호퍼에 관한 전기
1882년에 태어나 미국의 산업화와 세계대전, 대공황 등을 겪은 에드워드 호퍼. 이러한 시대적 배경 탓인지 흔히 그의 그림에 대해 현대 산업사회 속에서 느끼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공허를 표현했다고 말한다.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모습을 의미심장하고 시간을 초월한 듯한 장면으로 그려 내는 능력이 있었다. 흔히 보아 왔던 광경인데도 왠지 낯설고, 익숙한 공간인데도 생소하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도 외로워 보이는 느낌의 그림들이 그의 대표적인 그림들이다. 그런 그림들은 호퍼가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림의 시선은 인물들에게 개입하려 하지 않고 길 건너에서 바라보는 느낌이며, 모델들 또한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 속 인물은 주로 여성이며, 여성의 모델은 대부분 호퍼의 아내인 조세핀이었다. 조 역시 화가였고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줬으며 연극배우 출신으로, 호퍼가 어떤 역할을 요구해도 그 역을 표현해 냈다. 호퍼가 화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도 결혼 이후였으며,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작품을 그릴 때도 늘 함께였기에 아내와의 생활이 호퍼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화가로서,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긴 조는 호퍼와 크게 다투기도 했지만, 그의 작업에 늘 협조적이었으며 작업의 일부였다. 그들은 대부분 뉴욕과 나이액에서 생활했는데, 호퍼는 나이액에서 그린 집과 풍경들을 통해 빛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드러낸다. 그 그림들에서는 도시를 소재로 한 그림에서 느낄 수 없었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색보다는 빛에 관심이 많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의 그림 속 빛을 보면 그가 빛을 통해 자신이 보여 주고 싶은 것을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가 그린 빛은 색을 더 아름답게 해 주고, 그림자나 인물들의 표정과 대비되며 강렬한 인상을 준다. 호퍼는 빛으로 그림을 완성하며, 빛이 그림 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 준다.
표현주의와 추상미술이 주도했던 시기에도 꿋꿋하게 사실주의를 고집했던 호퍼는 훗날 추상표현주의가 쇠퇴하고 팝아트가 대두될 때, 팝아트와 신사실주의에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여겨졌다. ‘장면을 극도로 단순화’했던 시도와 간판 등 ‘당시에는 그림의 소재로 사용하지 않았던 것’들을 화폭에 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화가와 작가는 물론 히치콕 같은 영화감독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호퍼가 얼마나 까다롭고 철저하게 작품을 준비하고 그렸는지, 그가 색과 빛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그림의 소재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는지 보여 준다. 또한 작가 자신 또한 집요하게 느껴질 정도로 드로잉을 비롯한 그의 작품 및 기사,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 등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객관적으로 호퍼의 생을 담았다. 그리고 작가 게일 레빈의 노력으로 모은 드로잉과 캐리커처 등이 이 책에 다량 실렸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을 직접 눈으로 접하기 어렵고 (호퍼의 그림은 지금껏 단 한 번, 휘트니 미술관전에 유명하지 않은 작품 한두 점이 전시된 게 전부이며, 토마스 이킨스나 잭슨 폴락 등 거의 모든 미국 미술계 유명 작가의 작품 150점 정도가 들어온다는 미국 미술전 -2015년 예정 - 에도 호퍼의 작품은 그림 값이 너무 비싸서 보험료 부담 때문에 빠졌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제대로 된 책조차 없어 갈증 나 있던 호퍼 작품 애호가에게 이 책은 고마운 선물이 될 것이다.
「밤새우는 사람들」, 「중국 음식점」, 「뉴욕 영화」, 「주유소」등 총 90점의 컬러 도판 수록
호퍼는 그림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 번 드로잉하며 치밀하게 준비하는데, 이 책에는 그 드로잉 그림들이 상당수 실려 있어 호퍼의 사전 작업 형식이나 전반적인 작업 스타일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진 도시 풍경을 그린 작품은 물론이고, 건물이나 자연을 그린 풍경화, 그가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전 생계유지를 위해 그렸던 잡지 표지, 그가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데 기반이 되어 준 에칭 작품 등 총 90점의 컬러 도판이 별도로 수록되어 있어 호퍼의 작품 세계 전반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호퍼 자신이 현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살았던 점이 그의 예술을 독특하게 만들어 준다.
이 책은 호퍼의 어린 시절은 물론, 집안 내력까지 훑을 정도로 자세하게 (1,200페이지라는 엄청난 분량이 얼마나 자세한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을 상세히 다룬다. 뉴욕 미술 학교 시절 최고의 우등생이었던 호퍼는 프랑스 미술을 동경했고 파리로 건너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그곳에 매료됐고,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향이 그가 스타일을 잡는데 오히려 혼란을 준 부분도 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미술 학교 동기들은 화가로서 명성을 쌓아 가는데 호퍼는 절망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와 잡지 표지를 그리게 됐지만 전업 작가로서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 갔던 그는 마흔이 넘어서야 화가로서 인정받는다. 그는 주로 나이액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자동차로 여행하며 그림의 소재를 찾았다. 물론 늘 아내 조와 함께였다. 조는 자신의 감정은 물론이고 호퍼의 작품에 대해서도 일기에 기록했는데, 그림에 대해 묘사한 그녀의 글을 보면 그림을 상상하게 될 정도이다. 아마도 그녀의 일기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일기가 자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호퍼가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자료가 많지 않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되어 그림 그리는 일과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게 전부였던 호퍼의 삶은 그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이상하게도 호퍼 가족은 자손이 없다. 호퍼 부부도 자식이 없고, 그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는 미혼인 상태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며 처가 쪽으로도 조카가 없다. 그래서 호퍼가 죽었을 때 조는 유언대로 그의 작품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고 (물론 그가 유명해진 이후의 작품은 대부분 팔렸기 때문에 휘트니 미술관에는 그의 초기 작품이나 공개하지 않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유산 등을 정리했다. 그녀는 쓸쓸히 남아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1년 뒤 남편을 따라 갔다. 조는 호퍼의 마지막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가고 싶지 않아 했고, 나는 그가 간호를 받으면서 좀 더 머물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떠났다. 1분, 그리고 그는 갔다! 나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오후엔 우리뿐이었고, 그는 자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몸부림도, 통증도 없이, 심지어 기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였다!”
저자
게일 레빈
1976년부터 1984년까지 휘트니미술관에서 호퍼 작품집의 첫 큐레이터로 일했다. 호퍼에 대해 철저히 연구하며 호퍼에 관련된 자료들을 체계화시켰으며, 호퍼에 관한 도록을 만들었다. 그리고 휘트니 미술관에 호퍼 아카이브를 설립하여 향후 호퍼 연구의 초석을 만들었다. 또한 호퍼가 그린 작품과,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그린 드로잉을 함께 전시한 '에드워드 호퍼: 그의 예술과 인간' 등 주요 전시회를 기획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나 일본 등 해외에서 개최되는 호퍼의 주요 전시회 큐레이터로도 활약했다. 지금은 바루크 칼리지와 뉴욕 시티 유니버시티의 대학원 센터에서 미술사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조용한 공간들: 에드워드 호퍼에게 바치는 헌사』, 『고독한 시편: 에드워드 호퍼에게 바치는 헌사』, 『주디 시카고 전기: 예술가와 윤리 및 비주얼 아트』(공저) 등이 있다.
역자
최일성
경기고,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현대, 대우를 비롯한 국내 기업의 해외 법인장으로 20여 년 동안 해외에 거주하며 많은 해외 문화와 예술을 접했다. 옮긴 책으로는 BBC 방송국의 비즈니스 총서 『협상 기법』, 『소신 있는 자기주장』, 『북 비즈니스』, 『반 고흐: 사랑과 광기의 나날』, 을유문화사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의 『로런스 올리비에』, 『에드워드 호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