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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공간들

최윤필

272쪽, 145*210, 13,000원

2014년 08월 20일

ISBN. 978-89-324-7240-9

2015 세종도서 우수 교양 도서

이 도서의 판매처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 잊고 사는 익숙한 공간의 낯선 이야기 

변두리의 허름한 단칸 셋방과 엽기적인 살인 사건, 빌딩 지하 주차장과 검은 돈다발, 지하철 객차 안과 몰상식 ××녀, 극장과 백만 관객 달성의 흥행 기록, 국제공항과 해외로의 짧은 휴가.

이렇듯 우리 주변의 공간 대부분은 굳어진 관념이나 진부해진 이미지들에 갇혀 공간 본래의 성격과 표정은 사라지고 대상화될 뿐이다. 저자는 둔해진 감각, 게으른 습관으로만 공간을 인식했던 우리의 타성을 경계하는 방편으로 공간을 낯설게 보고, 공간에 겹겹이 드리워진 이미지들을 걷어낸 뒤 텅 빈 공간 자체의 표정을 살펴 우리가 누리는 공간의 가치에 대해 되새겨보자고 말한다.

 

공간은 누구나 누린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그 너머에 어떤 부가적인 차원도 허용하지 않고 이면에 어떤 배후도 거느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아무리 부풀리거나 짜부라뜨려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장이다. 인간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저마다 상이한 공간적 경험을 하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공간에 대한 관념을 갖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화한 기억이다. 추억은 벌집 같은 공간 속에 특정의 시간들을 압축하고 공간화한다.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에서 한 말처럼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이성 혹은 판단력이라고 부르는 모든 정신적 작용의 첫 꿈틀거림이 공간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 저자는 공간의 가치에 대해 역설하지만 반대로 공간은 우리의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 공간의 진짜 모습에 대해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그러나 박제화된 일상 공간을 낯설게 살피고 공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의외의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부대낌의 사연과 하소연들, 잊힌 시간 속의 ‘나’, 그리고 어떤 인연들…… . 그 시도는 책이나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내가 모르는 나와, 너무 잘 안다고 여겼던 작은 세상들을 새롭게 알아 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침묵으로만 교감되는 어떤 본질에 다가서는 길이 되기도 한다.

 

 

단조롭고 무료한 일상 풍경을 낯설고 생기 있게 만드는, 공간의 이면 읽기

이 책에서 저자는 생활공간처럼 흔히 접하는 곳 ‘여기’, 좀 멀찍이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공간 ‘저기’, 추상적이거나 접근하기가 꺼려지는 공간 ‘거기’로 구분하여 공간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중에는 <쇼윈도>나 <로또방>처럼 욕망의 공간도, <서울역>이나 <지하철>처럼 익명의 공간도, <외딴 방>이나 <농성장>처럼 고독한 공간도, <아궁이>나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공간>처럼 형이상학적인 공간도 있다.

 

특히 편의점, 커피숍, 지하철, 서울역, 극장, 공항, 로또방 등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크 오제(Marc Auge)가 비장소(non-place)라고 분류한 공간들과의 소통도 빼놓지 않는다. 똑같은 풍경, 유사한 표정을 가진 이들 장소는 잠시 거쳐 가는 곳일 뿐이므로 진정한 교류나 역사, 문화가 축적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비장소들은 현대에 나날이 늘어나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이곳들의 내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 없는 공간들은 단편적이나마 타인을 만나는 공감각적 공간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의 일터가 되기도 하고, 도시에 온기를 부여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공간의 표정을 읽어내고 목소리를 감지함으로써 무기질의 공간이 생기를 띠고 입체화되고, 일반 명사의 장소에서 고유 명사의 장소가 되는 셈이다.

 

저자가 의도한 ‘공간 낯설게 하기’는 물리적 공간을 넘어서 내면의 공간으로 깊어지고 확대된다. 저자는 <지금, 여기>의 마지막 꼭지로 글을 닫으면서 ‘지금, 여기’를 관성의 멱살을 틀어쥐고 냉엄한 현실을 대면케 하는 곳으로 정의한다. 이곳은 익숙하고 안정적인 오늘을 떨치고 불안한 내일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곳이다. 이때 안정과 관성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일수록, 삶의 현상적 외피를 비일상적인 시선으로 바라볼수록 변화는 커진다. 이를 통해 저자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모색한다.

 

 

 

본문 중에서

 

일상에서 우리가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도 공간화한 기억이다. 프루스트가『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끊임없이 유년의 마을과 길과 집과 방들을 소환하는 까닭도, 추억이란 게 벌집 같은 공간 속에 특정의 시간들을 압축-공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슐라르가『공간의 시학』에서 한 말처럼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다. (……) 우리들이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들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인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공간은 관계에서 유리된 채 대상화하거나 진부한 비유 속에 갇혀 굳어져 버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간의 성격이나 표정에 대한 환기만으로도 우리가 누리는 공간의 가치를 느끼고 누려 볼 수 있지 않을까.

- <들어가며: 벽, 공간의 뼈대>에서

 

 

저항의 한 표현으로 누가 누구에게 던지는 똥은, 행위의 구체적 폭력성은 적당히 은폐되면서 짱돌이 지닐 수 없는 숙연하리만치 강력한 정서적 파급력을 발휘한다. 1그램 안에 약 1천억 마리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는 ‘생화학 무기’지만 그때의 육체나 공간보다는 인격이나 공간 상징과 같은 정신성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은, 조금 비약하자면, 우리가 그런 효율적인 무기를 내장하고 있고 또 마르고 닳도록 생산해 낼 수 있는 역량의 담지자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또 당분간은 건강하게 살아 갈 것이라는 믿음을 물증으로 확인하게 해주는 곳도, 그러므로 화장실이다.

-<화장실: 애착과 배척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좋은 책이 늘 좋은 상품으로 평가받지는 못한다. 가치에 대한 시장의 빚은 대개 긴 시차를 두고 탕감되곤 하지만, 어둡고 게으른 눈들이 끝내 살피지 못해 영영 사라지는 책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서점의 서가는 그런 보석 같은 책들이 처음 지녔던 저마다의 자존감으로 저 혼자서 빛나며 버티고 있는 공간이다. 오연한 위엄이란 어쩌면 첫 대면의 순간에 감지되는 그런 기미에서 비롯되는 것일지 모른다.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담담히, 당당히 맞서겠다는 새 책의 드문 각오 같은 것.

- <서점: 위엄으로 오연한 정신들의 공간>에서

 

 

감옥에 갇힌 이들이 가진 거라곤 시간뿐이고 그 시간을 죽이는 게 일이라는 통념에 대해 추리 작가 존 하트는 거꾸로 ‘시간이 사람을 죽이는 곳이 감옥’이라고 했다. 바깥에서 볼 때 그들은 시간을 죽이고 있는 듯 여겨지지만, 갇힌 자는 창살과 콘크리트 벽 안에서 시간에 의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감옥을 지배하는 시간이라는 살인자는 대상을 모든 인연들로부터 서서히, 집요하게, 배제해 나간다. 갇힌 이들은 자신이 점차 잊혀 간다는 사실, 죽어간다는 사실을 조금씩 뜸해지는 면회나 편지의 횟수를 통해 실감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그렇게 되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오늘과 내일이 다르리라는 그 짐작을 하루하루 현실로 실감하면서 또 다가올 내일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옥은, 하트의 말처럼 절망의 공간이 아니라 두려움의 공간이라 해야 한다. 완벽한 절망 안에서는 두려움도 싹틀 수 없기 때문이다.

- <구치소 접견실: 두려움과 온기가 교차하는 자리>

 

들어가며_ 벽, 공간의 뼈대

1 여기
쇼윈도_ 천국의 꿈 이미지로 치장된 시간과의 전장
화장실_ 애착과 배척이 공존하는 공간
서점_ 위엄으로 오연한 정신들의 공간
극장_ 일상의 쩨쩨함을 견디기 위한 공간
흡연실_ ‘멸종 위기종’이 내몰린 최후의 도피처
커피숍_ 대중화와 고급화의 역설이 엇갈리는 공간
편의점_ 인스턴트 라이프의 경이로운 요약
지하철_ 서로 사랑할 수도 죽일 수도 있는 공간
계단_ 기능적 편리가 일상의 벽이 되기도 하는 자리
피트니스센터_ 제 몸과 반성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
택시_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른 여론의 나침반
교실_ 빛으로 채워진 기능 과잉의 공간

2 저기
낚시터_ 희망을 낚으며 자아를 긍정하는 공간
작업실_ 손이 손답게 활개치는 공간
서울역_ 온기와 표정을 잃어버린 도시의 얼굴
찜질방_ 진화하는 온기의 공간
로또방_ 삭막한 꿈의 공간
국제공항_ 맞서는 이미지들의 공간
캠핑장_ 일상이 유희가 되는 ‘일상’ 너머의 공간
건강검진센터_ 존재론적 두려움이 극대화하는 공간
숲_ 태고의 공간 감각을 일깨우는 공간
서울대_ ‘유배지’에서 ‘요새’로
의자_ 한 사람 분의 고독, 꿈, 시간, 기억이 머무는 자리

3 거기
아궁이_ 마음이 열리고 마음을 데우는 자리
외딴 방_ 한 고독한 이별의 자리
국립묘지_ 불멸하는 정신의 공간
처마_ 아늑한 은신과 조망의 공간
수술실_ 다기한 가치들이 대치하는 멸균의 통제 공간
구치소_ 접견실 두려움과 온기가 교차하는 자리
지하_ 죽음과 삶을 함께 보듬는 거처
농성장_ 벅찬 희망과 아득한 절망이 맥놀이하는 공간
해를 보내고 맞이하는 공간_ 시간이 공간과 하나되는 자리
빈소_ 여밈의 의미를 묻고 생각하는 공간

지금, 여기_ 빙판길처럼 미끄러운 자리

저자

최윤필

딸꾹질보단 뽁깍질이란 말을 더 편히 쓰는 서부 경남의 한 작은 동네에서 1967년 태어났다.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뽁깍질을 했고 슬픈 코의 피노키오에게 동지적 유대감을 느꼈다. 민중 어쩌고 하는 책들이 그럴싸해 보여 1985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고, 기자가 막연히 좋아 보여 1992년 한국일보에 취직했다. 2007년 사표를 내고 가구 학교에 입학한 것도 나무 만지는 일이 멋있어 보여서였는데 공방으론 밥벌이가 막막해서 2009년 비굴하게 재입사했다. 그럴싸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너무 늦게, 의심을 하게 되었다. 신문 연재 글을 긁어모아 2010년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라는 제목의 책을 낸 적이 있다. 언제부턴가 뽁깍질보다 딸꾹질이란 말이 더 편해지면서 거짓말처럼, 딸꾹질 않고도 거짓말을 곧잘 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나는 기자다’라거나, ‘나는 목수다’라는 참도 거짓도 아닌, 그래서 애매한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