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애도와 위기, 고독, 자기성찰, 여행
소설가, 화가, 철학자 등 87인의 내밀한 글쓰기
“일기는 독특한 증언이자 매번 사라져 버린 의식에 대한 탐구다”
감정과 사색을 담아내며 문학적 가치를 획득하는 일기
일기란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 따위를 적는 개인의 기록”이다. 수많은 개인이 저마다의 일상을 적어 내려가고 저마다의 역사를 기록해 나간다. 일기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기록물이기에 타인과 공유되거나 공공의 성격을 띠지 않는다. 하지만 유명인일 경우 얘기가 다르다. 그들의 기록은 대중의 관심을 끌고 어떤 경우에는 일기 그 자체가 한 시대의 역사를 증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안네의 일기』가 대표적이다.
“일기 속의 나는 세상의 나보다 더 진실하다”(프란츠 카프카), “일기를 쓰는 일은 나 자신에게 진실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버지니아 울프) 등 일기에 관한 수많은 명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일기를 쓰는 행위는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용기를 전제로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일기에는 꽤 괜찮은 나부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게 만드는 나까지 다양한 ‘나’가 있는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내면을 가장 진솔하게 드러내는 글쓰기로서의 일기는 다양한 감정과 사색을 담아내며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다.
일기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내 이야기를 담을 공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이 일상의 많은 것을 대신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특히 일기라는 장르에 있어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아날로그를 추구하는 듯 보인다. 노트를 구입하고, 직접 펜이나 연필을 쥐고선 정성스레 한 자 한 자 적어 내려간다. 종이라는 매체를 등에 업은 누군가의 일기는 먼 훗날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발굴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일기는 망각에 저항해 기록하면서 싸우는 것”
87인의 인생을 관통하는 일기 모음
프랑스의 기자, 그리고 문학박사이자 고서점 운영자인 두 저자가 직접 엮고 지은 『내면일기』는 소설가, 화가, 철학자 등 87인의 일기를 모아 놓은 책이다. 국내 독자에게 익숙한 작가들부터 그 이름이 생소한 역사 속 인물들까지 저마다 다른 시공간에 살았지만 각자의 일기장을 펼쳐 인생의 한순간을 기록했다는 사실만은 동일하다. 그들이 쓴 일기는 사랑, 애도, 삶의 위기, 고독, 자기성찰, 역사적 사건, 여행과 같은 주제 아래 묶인다. 이 키워드들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우리 인생을 관통하며, 독자는 일기를 통해 인생을 읽고 나의 내면을 그들의 내면에 대입해 보기도 한다.
본서의 저자 중 한 명인 소피 퓌자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일기를 정의했다. “일기는 일시 정지, 괄호, 멈춤이다. 한 페이지에 던져진 몇 개의 단어로 자기 시간을 고립하는 것은 나날을 쓸어가 버리는 망각에 저항해 그것을 기록하면서 싸우는 것이다.” 『인생사용법』의 저자 조르주 페렉 역시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마치 달아나는 삶의 무엇도 붙잡을 수 없을 것처럼 잊는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고 자신의 책에 썼다. 그리하여 그의 일기장은 마치 편집광적인 의무감으로 일상을 기록해 나가는 일지의 형식을 띤다. “정오경 기상. 『인생사용법』을 위한 계획 세움. 내 집에서 B와 (어제 남은 것으로) 저녁 먹음. B가 토라짐. 11시경 취침.”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의 일기는 인생의 가혹한 운명을 보여 준다. 그녀의 1906년 4월 30일자 일기다. “무시무시한 소식이 나를 맞이한다. (...) 피에르가 죽었다, 오늘 아침 건강하게 떠난 그가, 저녁에 두 팔에 안으려 했던 그가.” 마리 퀴리가 일기장을 펼쳐 이 문장을 적어 내려가기까지 또다시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지 그의 일기를 읽는 독자는 감히 짐작만 할 뿐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일기 원본 수록
‘내밀함의 거장’ 아니 에르노와의 대화
그날의 일기를 쓴 마리 퀴리의 필체는 생각보다 단정하다. 이성을 되찾고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 듯 보인다. 하지만 독자는 그의 일기 페이지에서 글자 외적인 것을 발견한다. 나란히 떨어진 눈물 두 방울. 눈물을 머금은 글자들은 다소 흐릿하게 번져 있다. 본서에는 이처럼 일기 내용뿐 아니라 인물의 필체나 당시의 상황 등을 짐작케 하는 스케치 등이 고스란히 담긴 일기 원본이 도판으로 실려 있다. 일기들은 때로 정갈하고, 때로는 머릿속 혼돈을 반영하듯 삭제하고 고쳐 쓴 흔적들도 보인다. 우리의 일기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책의 도입부에는 ‘일기’에 관한 아니 에르노와의 대화가 실려 있다. 저자는 그녀를 내밀함의 거장이라 칭한다. 실제로 에르노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일기를 쓴 사람이기도 하고, 그녀의 작품들은 개인적 기억을 집요하게 탐구함으로써 탄생했다. 아니 에르노는 이 대화에서 『단순한 열정』, 『사건』, 『집착』 등을 쓰는 데 자신의 일기를 사용했다고 밝히고, 사후에는 일기를 정식 출간할 계획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그녀의 일기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훗날의 『내면일기』 같은 책에서 우리는 그녀의 일기를 발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저자
소피 퓌자스
프랑스 시사 주간지 『르 푸앵Le Point』의 기자이자 작가. 주요 저서로는 화가 조란 무시치에 관한 소설 『Z. M.』(2013)과 『게리 쿠퍼의 미소Le sourire de Gary Cooper』(2017), 『가재는 불멸이다Les homards sont immortels』(2022), 『잃어버린 걸작Chefs-d’oeuvre disparus』(2024) 등이 있다.
저자
니콜라 말레
프랑스 문학 박사이자 고서점 운영자. 여러 출판사의 편집인으로도 활약하며, 파리 낭테르대학에서 강의도 한다.
역자
이정순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보부아르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문학, 여성문학, 인문학 등을 강의했고,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에서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 이사로 있다. 박사 학위 논문 「시몬 드 보부아르의 철학사상과 문학표현」 외에 「시몬 드 보부아르의 자서전」, 「『아름다운 영상』과 『위기의 여자』에서의 여성 이미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삶, 작품, 사상의 변증법적 관계」, 「1970~1980년대 시몬 드 보부아르의 페미니즘 활동과 사유에 대한 일 고찰」 등의 논문을 썼고, 저서로는 『페미니즘 어제와 오늘』(공저), 『성노동』(공저)이 있다. 또한 『제2의 성』, 『보부아르의 말』, 『남성의 재탄생』, 『사랑의 모든 아침』,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편지』(예정) 등 여러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