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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_10

도화선

공상임 ,이정재

684쪽, B6, 15,000원

2008년 09월 20일

ISBN. 978-89-324-0340-3

이 도서의 판매처

남녀 이합의 정을 빌려 역사의 흥망을 애도하다 명 말기 젊은 선비들에게 탄핵당해 정계에서 물러나 남경에 머물고 있던 간신 완대성은 젊은 선비들 사이에서 신망이 높던 후방역을 끌어들이면 재개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미인계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에 가깝게 지내던 양문총(楊文?)에게 부탁하여 자색과 기개가 고루 뛰어난 남경의 명기(名妓) 이향군과 후방역의 만남을 주선하고 혼수품을 바친다. 나중에 이런 내막을 알게 된 이향군은 일언지하에 완대성의 혼수를 거절하고, 후방역 역시 그런 이향군의 곧은 뜻을 따른다. 체면을 구긴 완대성은 복수를 다짐하고 후방역을 함정에 빠뜨린다. 결국 후방역은 완대성의 음해로 인해 회안 조무(淮安漕撫)로 있던 사가법(史可法)에게 가 몸을 피한다. 이 무렵 이자성(李自成)을 중심으로 한 농민 반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목을 매어 자결하고 만 사건이 일어난다. 북경 함락 소식은 곧바로 남경에도 전해지고, 이에 봉양 독무(鳳陽督撫) 마사영(馬士英) 등은 완대성과 결탁하여 명의 부활을 내걸고 복왕(福王, 홍광제)을 옹립하는데 이로써 남명(南明) 왕조가 시작된다. 정권을 장악한 마사영과 완대성 일당은 동림당(東林黨) 사람들을 대거 탄압하는가 하면 경쟁자인 사가법을 북방 방비를 명분으로 양주(揚州)로 보내 버리는 등 전권을 휘두른다. 또한 권세를 빌려 이향군을 완대성과 동향 사람인 전앙(田仰)에게 시집보내려고도 했다. 이향군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완강하게 거절하다가 혼절하고 마는데, 이때 흘린 피가 후방역이 맹세의 표시로 주었던 부채를 적시고 만다. 양문총이 이 부채에 나뭇가지를 덧붙여 그려 넣으니 마치 복사꽃이 핀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극의 제목과도 같은 ‘도화선(桃花扇)’이다. 혼절에서 깨어난 이향군은 스승인 소곤생(蘇崑生)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피로 물든 도화선을 피신 중인 후방역을 찾아 전해 주게 한다. 한편 청(淸)의 군대가 기세등등하게 남하하자 남명의 운명도 풍전등화에 처한다. 충신 좌량옥(左良玉)은 황제 곁의 간신들을 제거하고 태자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남경으로 진군하다가 반란군이라는 멍에를 쓰고 자결하고, 청에 대항하여 양주를 힘겹게 지키던 사가법마저도 꺼져 가는 국운을 통탄하며 강물에 몸을 던진다. 양주가 함락되면서 남경마저 위태로워지자 마사영과 완대성은 남쪽으로 도망가는 길에 목숨을 잃는다. 이로써 남명의 운도 다하고 만다. 나라가 망한 뒤 여전히 후방역을 찾지 못한 이향군은 서하산(棲霞山)으로 들어간다. 장 도사(張道士)는 명의 충신들을 애도하는 제사를 올리고, 후방역과 이향군은 이곳에서 마침내 우연히 재회하여 기쁨을 나눈다. 그러나 장 도사는 이들의 사랑 놀음을 준엄하게 질타하고, 이에 크게 깨달음을 얻은 후방역과 이향군은 그 길로 수도(修道)의 길로 들어선다. 공상임은 후방역과 이향군의 만남과 이별과 재회의 이야기에 기대어 명 왕조가 누구 때문에 패망했는지를 엄중하게 묻기 위해 이 극을 썼다고 밝혔다. 공상임은 명 패망의 일차적인 장본인은 완대성, 마사영 등으로 대변되는 패악한 권력 집단이며, 자신의 보신에만 급급한 양문총이나 주인공 후방역마저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보았다. 『도화선』은 발표 후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당시 청의 서울인 북경에서는 하루도 공연이 끊이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젊은 남녀의 비환이합(悲歡離合)이라는 낭만적인 주제와 직전 시대의 역사에 대한 뼈저린 회한과 반성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현실 정치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한 점도 관객/독자로 하여금 부담 없이 이 작품을 감상하고 사색하게 해 주었다. 『도화선』은 작가의 역사 인식에 걸맞은 인물을 역사에서 건져 올려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들고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진정한 역사극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주석이 상세하고 오류가 비교적 적어서 오랫동안 널리 보급되어 온 왕계사(王季思) 교주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일러두기
소인
소지
본말
범례
고거
강령
등장인물

권1
시1척 서막
제1척 유경정의 설서
제2척 노래 공부
제3척 석전대제
제4척 간신 비난
제5척 첫 만남
제6척 혼인
제7척 혼수 거절
제8척 수사의 소동
제9척 군사들의 소란

권2
제10척 편지 작성
제11척 편지 전달
제12척 이별
제13척 숭정제의 승하
제14척 복왕 옹립 반대
제15척 복왕 옹립
제16척 새 조정
제17척 개가 거부
제18척 장수들의 불화
제19척 화해 실패
제20척 하남행
윤21척 대화

권3
가21척 후반부 서막
제21척 권력에 아첨하다
제22척 수절
제23척 도화선의 탄생
제24척 향군의 비난
제25척 배우 선발
제26척 고걸의 죽음
제27척 도화선 전달
제28척 어긋난 재회
제29척 체포와 투옥

권4
제30척 장미의 출가
제31척 탄핵안 작성
제32척 숭정제 제사
제33척 옥중의 모임
제34척 좌량옥의 죽음
제35척 결사 항전
제36척 간신들의 죽음
제37척 황제의 피랍
제38척 사가법의 죽음
제39척 서하산 출가
제40척 재회와 귀의
속40척 남은 이야기


해설: 공자의 후예 공상임과 그의 희곡 『도화선』
판본 소개
인물 소개
공상임 연보

저자

공상임

공자의 64대손인 공상임은 청 순치제(順治帝) 5년(1648)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곡부는 옛 노나라의 수도로, 공자와 관련한 유적이 많은 곳이다. 공상임은 성년이 될 때까지 곡부에 머물며 글공부를 하다가 31세에 향시에 응시했지만 낙제했다. 이후 고향 근처의 석문산에 초막을 짓고 은거하면서 『도화선』 초고를 완성했다.
37세인 1684년, 강희제(康熙帝)가 곡부에 들렀는데, 이때 공상임은 황제에게 유가 경전을 강의하고 문묘를 안내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국자감 박사에 전격적으로 발탁된 공상임은 얼마 뒤에는 회안부와 양주부 일대의 치수 사업을 담당했다. 회안부와 양주부에 머무는 동안 공상임은 백성들의 고통을 몸소 체험했고, 또 명(明)의 유민들과 사귀면서 명 왕조의 흥망에 관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모았다. 그리하여 40세인 1687년에 『도화선』을 개고했다. 북경으로 돌아온 공상임은 몇몇 한직을 옮겨 다녔고, 쉰두 살인 1699년에 『도화선』을 다시 고쳐 최종판을 완성했다. 약 10년 단위로 개고 작업을 거듭한 끝에 탄생한 『도화선』은 당시 북경 일대를 뒤흔들어 하루도 빠짐없이 공연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공상임은 일생의 대부분을 청나라가 본격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한 강희제 치세기에 살았지만, 유가적 정통 왕조인 명나라의 신하임을 자임한 부친의 영향으로 전 왕조에 대해 회한과 애도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인 『도화선』은 바로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서거와 남명 왕조 초기 복왕(福王) 정권의 흥망을 다룬 역사극으로, 명에 대한 애도의 뜻이 담겨 있다. 이것은 공상임이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공상임이 남긴 그 밖의 작품으로는 고채(顧彩)와 함께 쓴 전기(傳奇) 『소홀뢰(小忽雷)』와 시사집(詩詞集) 『호해집(湖海集)』, 『안당고(岸堂稿)』 등이 있고, 문집으로 『석문산집(石門山集)』이 있다. 한편 공상임은 고증에도 밝아 이후 형성되는 유명한 고증학 집단인 건가학파의 선구자로도 평가받는다. 강희 57년(1718)에 일흔한 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역자

이정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과정 중에 중국 산둥대학(山東大學)에서 유학했고, 귀국 후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특별 연구원으로 있었다. 서울대학교, 서원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한밭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대구한의대학교 중어중국학부 조교수로 있다. 옮긴 책으로 『근대 중국의 언어와 역사』, 『중국 고대 극장의 역사』(공역)가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백박 잡극 연구」, 「고사계강창 연구」, 「도화선의 이념적 지향」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