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을유세계문학전집_144
말테의 수기
Die Aufzeich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
탄생 150주년에 빛나는 대문호 릴케의 자전적 소설
강렬한 이미지와 몽타주 기법으로 드러내는 삶의 이면
“나는 그의 마음속에 깃든, 이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인간을 보았고 또 사랑했다.”
폴 발레리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가 저자 탄생 150주년을 맞아 을유세계문학전집 144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폴 발레리, T. S. 엘리엇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릴케의 문학 세계와 작가의 사상을 만날 수 있는 반자전적인 작품으로 독일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시인
릴케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
『말테의 수기』는 서정시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으며 근현대 문학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최고 시인 가운데 한 명인 릴케의 반자전적 소설이다. 상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시적인 문제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저자의 깊은 성찰이 담겨 있으며, 대도시에서 보이는 비인간성과 죽음의 일상화, 고독, 신에 대한 믿음 등 다채로운 주제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일기체로 쓰인 이 작품은 텍스트 간에는 개별적으로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전통적인 서술 기법에서도 완전히 벗어나 있다. 대신 이미지와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일종의 몽타주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릴케는 서사적인 구성 대신 하나하나의 인상이 전체 그림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취한다. 『말테의 수기』에서 보이는 기존과는 다른 혁신적인 서술 기법은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비롯해 여러 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용상으로도 현실과 주체의 파악, 현대 세계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문화 비판적 성찰 등 기존 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시각을 선보이며 오늘날 모더니즘의 길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 속에서 말테의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새롭게 해석된다. 파리에서 본 가난한 자들, 어린 시절의 추억, 책에 대한 감상 등등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묘사된다. 이를 통해 릴케는 삶의 진실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말테의 수기』에서 아벨라르와의 비극적 이야기로 유명한 엘로이즈를 비롯해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이 계속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릴케는 삶과 죽음, 융화와 포용을 이야기하며 상대와 자신을 자기완성에 이르도록 한다. 자칫 지난할 수 있는 여정이지만, 아름다운 시적 문체와 “신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같은 철학적 잠언이 독자를 성찰의 길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강렬한 이미지와 몽타주 기법으로
드러내는 삶의 이면
『말테의 수기』는 릴케가 주인공의 눈을 빌려 인물에 대한 인상뿐만 아니라 사물에 관한 이미지를 새롭게 발견해서 형상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주인공은 사물 속으로 들어가 사물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장면에서는 인물보다 사물이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말테는 오래된 저택의 빈방에 사람들이 들어서는 장면을 멍하니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던 사물들에게 끔찍한 시간이 찾아왔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빈방을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들의 행동과 말에 집중하지만, 릴케는 이 장면에서 사람을 지우고 대신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 말테에게는 누군가 성급하게 책을 펼치다가 책갈피에서 장미 꽃잎이 나풀대며 떨어져 발에 밟히는 장면이 깊게 남아 있을 뿐, 책을 펼친 인물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구체적인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을 배제하는 이러한 독특한 구성으로 인해 어떤 경우는 인물보다는 사물이 오히려 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한다. 빈방에 남아 있던 물건 가운데 잘못해서 구부러진 것들은 커튼 뒤에 숨겨지거나 벽난로의 금빛 창살 너머로 던져지지만, 정작 행동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사물 위주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이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독특한 풍경 묘사는 독자들에게 낯설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동시에 릴케가 대시인으로서 우리는 들을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숨겨진 말들을 들으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저자
라이너 마리아 릴케
20세기 최고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현대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릴케는 프라하에서 태어나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섬세한 감수성을 바탕으로 삶의 본질, 사랑, 고독, 신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파헤친 작품을 남겼으며, 독일 서정시를 완성시켰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기도시집』『형상시집』『로댕론』『신시집』『말테의 수기』『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외에 다수의 시, 단편소설, 희곡, 예술론 등 여러 장르의 작품을 썼다.
역자
김재혁
김재혁은 고려대학교 독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릴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독문과에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다. 1994년 로 등단한 시인이며 시집으로는 가 있다. 그가 가장 관심 있는 주제는 릴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