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3대 문호로 불리는
투르게네프가 그려 낸 사랑과 혁명의 전야
“가장 맑은 정신, 가장 따뜻한 심장, 가장 넓은 공감의 작가”
─ 조지프 콘래드
1860년 발표와 동시에 좌우 진영을 가르며 격렬한 논쟁을 촉발한 『전날 밤』이 을유세계문학전집 148권으로 출간되었다. 크림 전쟁과 농노 해방을 앞둔 러시아 사회의 정신적 동요를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조국 해방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불가리아 혁명가 인사로프와 행동하는 삶을 갈망하며 그를 선택한 러시아 귀족 여성 옐레나의 이야기를 통해, 투르게네프는 무기력한 관념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전날 밤’을 묘파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형상을 온전히 구현해 냈다.
시대와 인간을 가로지르는 소설
소설의 중심에는 아름답고 지성적인 러시아 귀족 여성 옐레나가 있다. 낭만적인 조각가 슈빈과 진지한 학자 베르세네프가 그녀를 사랑하지만, 옐레나는 두 사람의 관념적이고 수동적인 삶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찾지 못해 갈증을 느낀다. 어느 날 터키의 압제로부터 조국 불가리아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청년 인사로프를 알게 된 그녀는 그에게서 말과 생각에 그치지 않는 진정한 삶의 행동을 발견하고, 결국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와 결혼하여 그의 대의에 동참한다. 인사로프의 삶은 작품에 역사적 무게를 부여한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터키 장군에게 유괴당해 살해되고, 아버지는 복수를 시도하다 총살당한다. 그 비극을 가슴에 품고 조국의 해방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 인사로프의 형상은, 투르게네프가 당대에 요청한 새로운 인간, 즉 관념이 아닌 행동하는 인간의 구현이다.
옐레나가 인사로프를 선택하는 것은 단순한 연애의 결말이 아니다. 그녀의 선택은 러시아 사회가 더 이상 무기력한 이상에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투르게네프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인사로프는 불가리아로 귀국하는 도중 병사하지만, 옐레나는 부모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불가리아에 머물며 남편의 대의를 계승한다. “드미트리 인사로프의 조국 외에 내게 다른 조국은 없습니다”라는 그 편지의 문장은, 사랑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넘어 역사적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를 압축해 보여 준다.
문학사의 논쟁을 낳은 걸작
발표 즉시 이 소설은 좌우 논쟁의 한가운데에 놓였다.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가 도브롤류보프는 「진정한 그날은 언제 오나?」에서 인간 감정 묘사의 섬세함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주인공을 러시아인이 아닌 불가리아인으로 설정한 것에 불만을 표하며 “우리에게는 러시아인 인사로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비평은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작품이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실제 비평의 정수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사와 사회사상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에 투르게네프는 비평을 잡지에 게재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동시대인』 편집진과 결별하게 된다. 도브롤류보프의 이 비평 전문이 이번에 국내 최초 번역으로 함께 수록되어, 독자들은 소설과 비평을 나란히 읽는 드문 경험을 할 수 있다.
서사의 차원에서도 이 작품은 풍부하다. 투르게네프 특유의 서정미 넘치는 문체와 정밀한 자연 묘사가 곳곳에 빛나며, 옐레나의 일기와 슈빈의 조각품, 등장인물들의 논쟁적 대화를 통한 섬세한 성격 묘사가 돋보인다. 특히 귀국 도중 베네치아에 들른 인사로프와 옐레나가 봄날의 대운하를 따라 곤돌라를 타고 여행하며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관람하는 장면은, 죽음이 짙게 드리워진 소설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공감 어린 부분으로 꼽힌다. 무대 위 비올레타가 “날 살게 해 주소서……. 이렇게 젊은데 죽어야 하나요!”라고 절규할 때, 옐레나는 조용히 인사로프의 손을 찾아 쥔다. 두 사람 모두 그 노랫말이 무엇을 예감하는지 알면서도, 서로를 향해 말 없이 그것을 확인하는 이 장면에서 투르게네프 특유의 페시미즘과 서정성이 가장 짙게 응축된다.
저자
이반 투르게네프
역자
이항재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교수,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을 지냈고, 단국대학교 러시아어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소설의 정치학』, 『사냥꾼의 눈, 시인의 마음』, 『러시아 문학의 이해』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 『러시아 문학사』, 『첫사랑』, 『루딘』, 『귀족의 보금자리』, 『아버지와 아들』, 『연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랑에 대하여』 등이 있고, 러시아 문학에 관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